그림이란 시각으로만 이루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삶의 모든 양상들과 관련된다.

"전시를 할 때였는데 식물을 전시하고서 나중에 버리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저한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제가 키우는 식물을 전시장으로 옮겨왔다가 다시 작업실로 들고 와요. 계속 키우거든요." (김지수)

당연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인간의 우월적 지위의 종말을 고하는 모든 시도 역시 결국 인간 중심주의적 시각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국내 미술계에서 지난 3-4년간 유행해오고 있는 '신유물론'이라는 철학적 태도나 '생태예술'이나 '인류세예술'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흐름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계와 인간계의 구분을 허물고자 다양한 이론이 제기되고 있으나 인간 특유의 시각을 배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에 생태예술을 둘러싼 이론적 태도에 일단 거리를 두고, 정작 예술가들이 자연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더 관심이 간다. 최근 국내 작가들이 자연과 조우하는 과정은 인간으로서 자연에 대하여 특별히 우위를 점유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스스로의 시점을 포기하고 있지도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더욱 개인적으로, 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투영된 자연을 바라보게 만든다. 직관적으로 대상을 '유용'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숙명을 굳이 회피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김지수는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생태를 주제로 한 드로잉, 회화, 혼합 설치,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예술가이기 전에 열렬한 식물 애호가이자 재배자로서, 전시장에 옮겨오는 이끼나 여타의 식물은 지금도 그의 작업실에서 자라고 있는 것들이다. 실제로 김지수는 매우 구체적으로 식물이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고 생존해 가는지 지난 10여 년간 그 과정을 항시 관찰해왔다. 최근 작가는 평소에 자신이 키우는 이끼의 존재감을 관객들이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빛이나 소리와 같은 연극적이고 비시각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보다 직관적이며 때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접근 방식이 돋보인다.

드로잉과 회화를 모아서 설치한 <채집된 순간>(2013-2014)에서 작가는 '공식화'된 과학적 지식과 정보를 내재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지녀온 각종 동식물에 대한 관심을 작가는 자신만의 '바이오 드로잉'으로 풀어내었다. 벽면에 나열된 A4 용지 정도 크기의 종이에는 식물이나 동물에 관해 작가가 생물학적인 정보, 작가의 상상력에 근거를 둔 표현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 혹은 언어적인 정보, 시각적인 정보가 혼재되어 있다. 이는 생태예술이 전문적인 자연과학 지식을 필요로 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 작가의 개인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해 만들어진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관객에게 환기시킨다. 여기서 '채집'은 인위적으로, 혹은 힘을 사용해서 자연으로부터 샘플을 추출한 객관적인 식물의 자료라기보다는 작가가 자연과 조우하게 되는 다양하고 개인적인 경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김지수 회화의 이원적 혹은 다원적 체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조나 층위를 만들어가는 방식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해석과 시선을 배제하고 개인적인 상상력을 따르기 때문이다. <채집된 순간>뿐 아니라 그의 '뿌리' 드로잉 연작이나 사진 작업 <테미 나무>(2016)에서 작가는 눈에 띄게 다양한 시점을 선보인다. 보이는 현상계와 현상계 너머의 이중적 혹은 다변적 리얼리티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너>(2016)에서 뿌리는 생명의 근원에 해당하기도 하지만 뿌리는 땅 위로 나온 식물의 부분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 지지체이기도 하다. 동일한 현상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과 시각이 가능할 뿐 아니라 현상계 너머의 보다 더 큰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테미 나무>에서 겹겹이 쌓여진 사진의 층위는 지층을 연상시킨다. 김지수 작가의 <어울림>(2014) 시리즈도 안과 밖, 이쪽과 저쪽에 그려진 그림이 서로 투영되면서 쉽사리 한 측면에서 명확하게 규정된 자연현상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즉, 빛이 투과되는 천의 양쪽 면을 활용해서 식물의 드로잉을 새겨넣다보니 한 면이 다른 면의 이미지를 가리거나 중첩된다. 다양한 정보가 병치되듯이 유리 화면 앞과 뒤의 서로 다른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모든 존재와 이미지는 맥락 속에서 상대화된다. 생태계의 구조가 지닌 유기적인 속성을 연상시킨다.

최근 4-5년간 김지수가 집중하고 있는 생태예술교육이나 영상, 사운드 설치는 식물이 '스스로 말하게 하기', '인간과 소통하게 하기'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움직임, 소리, 냄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명확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다양한 영역을 다루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리, 냄새, 움직임은 김지수의 입장에서는 식물이 생존해가기 위한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전혀 다른 언어와 소통방식을 지닌 인간에게 식물의 몸짓을 느끼고 교육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서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마당에서 펼쳐진 퍼포먼스 <페트리코>에서 인체의 혈관처럼 식물의 몸체 내부를 움직이면서 자양분을 공급하는 엽록체의 운동에 빗댄 '그린블러드'와 협업하였다. 무용수는 식물의 내부를 인체에 비교하고 엽록체의 움직임을 신체의 움직임으로 표현하였다. 동시에 작가가 설치한 천막 모양의 실내에서는 빛과 냄새가 감지된다. 흡사 살아 있는 생명체 그 자체를 모방해서 만들어놓았다. 관객은 이글루와 같이 생긴 페트리코에 들어가서 식물의 냄새나 빛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후각은 가장 인문학적인 설명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냄새와 연관될 뿐 아니라 식물이 자기 생존을 내기 위해서 발산하는 화학적 반응과 연관된다. <아버지와 나>(2019)에서 작가는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속으로 깊게 자리한 아버지의 서재 공간에서 찾은 서류 가방과 작업실 베란다에서 키운 이끼 위에 자연스럽게 싹을 틔운 다양한 식물을 함께 설치하였다. 후각은 뇌과학에서 정의하는 바에 따르면 기억을 보관하는 뇌의 부분과 가장 가깝게 위치해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냄새가 난다'는 것은 오랫동안 부정적인 의미를 지녀왔다. 부연하자면, 긍정적인 냄새와 부정적인 냄새, 특정 문화권을 상징하는 냄새와 '건강하고 바람직한' 아로마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첨예한 이슈이며 경제적인 이슈이기도 하다. 서서히 공기를 타고 퍼져간다는 점에서도 냄새는 소리와 달리 조절이 용이하지 않은 '문제적' 개체이다.

그러나 후각이 신기루와 같이 쉽사리 제어가 어려운 요소라면, 식물의 입장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자기방어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이미 <숨>(2016) 시리즈에서 관객이 작업에 다가가서 소리를 내면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을 걸면') 불이 켜지고 소리가 나도록 하였다. 작가에게 냄새는 식물의 존재감을 관객에게 알리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정 생명체가 외부 환경과 만나서 조응하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게다가 냄새는 인간의 기억에 깊게 저장되는 자극 수단이다. 올해는 오프라인에서는 채집한 냄새를, 온라인에서는 관객의 후각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향을 전송하는' <시공향>을 캔파운데이션의 그룹전 <다가온 미래 : This is Tomorrow>에 전시한 바 있으며 앞으로 다양한 감각기관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물론 전시장 내부에서 식물의 냄새가 지속적으로 퍼져 인간과 식물이 서로 대화하는 상태를 직접 관객이 느끼게 하려면 여러 기재가 추가로 필요할 것이다. 현재 작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채집한 냄새를 사용하고, 전시가 끝나면 언제든지 그가 사용한 식물을 제자리로 옮겨놓고자 한다. 진행형인 김지수의 행보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의 작업이 요사이 미술관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리서치 중심의 생태예술, 즉 극도로 중립적인 외형을 갖고자 노력하거나 아카이브라는 명목으로 생물학적 사실을 나열하는 생태예술과 다른 궤를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지수는 작가이기 전에 반려식물 보호자로서 오랫동안 식물과 동거를 이어가고 있고, 특정한 방식으로 식물을 재현하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갖고 있지 않아 보인다. 객관적인 연구 결과나 통계를 활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의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해석이나 표현이 빈번하게 발견되는 것은 그가 이러한 의무감에서 해방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도 생태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이 결국 '자연과 인간의 비언어적인 감각의 소통을 활성화시키는 일'이라는 점을, 그러한 것이 '예술가의 소임'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