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코 앞에 있는 것을 본다는 건 지속적인 투쟁이다."1
— 조지 오웰
감각의 역사에서 후각이 다른 감각들에 비해 오랜 시간 폄하되거나 주목받지 못했 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자주 지적되어온 것은 그것이 소위 '동물(성)'과 지나 치게 가깝다는 인식이다. 감각의 대상이 악취건 향기건 '코를 킁킁대는 존재'는 '인간' 보다는 '동물'의 특성을 환기한다는 것이다.2 이는 "만약 내가 본다면, 나는 하나의 대 상에 주목하지만, 내가 냄새 맡고 맛을 본다면, 나는 내 몸이 영향받는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라는 칸트의 서술에서도 압축적으로 드러난다.3 후각은 정신보다는 몸, 이성보다는 감성에 가깝고, 감성의 위계 속에서도 하단에 자리 잡는 감각이라는 것. 고결한 '이데아' 의 매개라 할 시각과 청각을 선호했던 플라톤이 후각을 "생기다 만" 감각으로 간주한 것 은 그리 놀랍지 않다.4
역사적 편차가 없진 않지만, 후각에 대한 이러한 위계적 태도는 과거나 현재나 동 양이나 서양이나 '상식', 즉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공통감각(common sense)'에 가깝 다. '냄새 서술의 대가'로 간주되는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하층계급은...냄새가 난 다"는 문장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삶과 영국의 역사 전반을 관류해온 계급적 적대를 포착 했다.5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이렇게 냄새로 표지되는 계급의 감각, 혹은 "자본주의의 냄새"를 영화로 절묘하게 담아내 아카데미상을 받고 전세계적인 반향을 얻은 바 있다.6 하지만 셰프들은 예외가 아닐까? 얼마 전 국내외에서 큰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 프로그램 <흑백요리사>가 소환한 이들처럼, 언제나 냄새를 맡아야 하는 사람들은 다르지 않을까? 서 로 다른 식재료와 향신료를 이용해 불쾌한'냄새를 잡는' 방법의 전문가라는 의미에서, 이 들은 냄새와 향기의 이와 같은 위계적 공통감각을 안정시키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이라는 용어의 함의나 '요리계급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의 부제는 이런 의미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후각에 대한 이러한 '상식'은 이른바 '문명 vs. 야만'의 이분법과도 친화력을 보였다. 가령 '야만인이 (서구의) 문명인들보다 후각이 발달됐다'는 견해는 17세기 이후 가속화되는 유럽의 계몽주의와 식민주의의 이중적 기획 속에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 다. 서양인들이 야생의 '미개인'들에게서 발견한 예민한 후각과 묘사의 풍부함은 '서구 문명'의 정신적 우월함과 '야만의 동물성'을 재확인해 주었던 것이다. 실지로 말레이시 아의 자하이족은 지금도 박쥐의 배설물과 휘발유, 노래기의 냄새와 "새우 페이스트, 곰나 무 수액, 호랑이 고기, 썩은 고기의 냄새"는 물론, "비누, 두리안 과일의 톡 쏘는 냄새" 를 가리키는 각기 다른 용어들을 자랑한다.7 줄기와 꽃의 냄새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해당 식물을 단 하나의 대상으로 취급한 옥스퍼드 대학 교수가 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런 의미에서 놀랍지 않다.
이렇게 후각에 대한 접근과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들은 예술의 영역에서 다 른 방식으로 확장 또는 심화된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지속성 의 문제다. 그림과 조각, 사진과 영화로 이어진 시각의 역사나, 악보와 녹음기의 도움을 받 을 수 있었던 청각과 달리, 냄새는 지속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키틀러 같은 매체학자의 입장에서 이는 '저장(storage)'과 '송신(transmission)'의 문제다.8하지만 향수처럼 용기 에 보관하면 되지 않을까? 이는 소위 '재현(representation)'을 둘러싼 고전적이면서 보다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가령 보관된 향 자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작품'으로 간주 할 수 있을까? 냄새를 원상태로 보관하고 나아가 재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에 대 한 미학적 평가와 직결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거나 최소한 유보적이다. 이 는 문제의 대상이 꽃향기인가 시체 썩은 악취인가, 조향사가 새로 만든 신제품인가라는 것 과도 독립적이다. 그림이나 사진, 혹은 영화 같은 대상이나, 음반이나 파일을 통해 반복 재 생될 수 있는 시각과 청각에 비해, 후각의 지속성은 향유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작품'의 형성으로 직결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미메시스'나 '리얼리즘'이라는 유구한 전통을 재소환한다. 가령 '후각의 모더니스트'나 '냄새의 포스트 모더니즘'이 있을 수 있을까? 이는 냄새 자체를 묘사하고 이름붙이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좀 전 환기한 자하이 족의 풍부한 어휘에 비해 후각이 "단어가 없는 감각"으로 불렸던 서구의 상황은 넓은 의 미의 '근대'를 공유하게 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9
김지수는 후각이 감각의 역사 속에서 겪어온 이 난처함을 그 누구보다 지난하고 다 채롭게 파고 들어온 작가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후각만 천착해온 것은 아 니다. 가령 해골이나 그림 프레임, 카메라와 삼각대, 의자와 책상을 부드러운 양모(wool)로 뒤덮었던 그의 초기작들(e.g. <무제 Untitled>(2001) 시리즈나 <호기심 Curiosity>(2001), <하나 라도 백 개인 의자와 책상>(2011))은 촉각에 집중한 작업들이다. 비슷한 시기에는 인상주의 의 점묘법을 떠올려주는 회화 작업들도 시도했고 (e.g. <무한한 Unlimited>(2002), <움직임에 대하여 Aboutn Moving>(2002), <Survive>(2002)). <하지 마 Dont'>(2013)처럼 개념적인 시각 에서 언어를 전경화한 작업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어린 시절부터 냄새를 잘 맡고 오래 기억하는 예리한 후각의 소유자”라는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냄새는 대상의 본질이다. 대상의 본질은 냄새 다”10라고까지 단언한다. 이러한 ‘이행’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냄새를 제외한 나 머지 감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일까? 그가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전시한다는 사실은 이러 한 단언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식은 그를 단순히 ‘공감각자’라 기술하는 것이다. 실지로 그는 자신 을 “후각과 시각, 텍스트를 동시에 떠올리는 공감각자”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가 ‘바이 오 드로잉(Bio-drawing)’이라 명명한 일련의 그림들이나, <냄새풍경>(2023) 전시장 1층 뒤 켠, 또는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것은 부산이 아니다, 전술적 실천>(2024) 전시에 선보 였던 회화 작업들을 떠올려 보라. 전자가 현미경으로 본 세포의 미시적 모습을 떠올려준다 면, 후자에는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묘사들이 덧붙여진다. 이러한 예들은 그를 “후각과 시 각, 텍스트를 동시에 떠올리는 공감각자”로 요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환경과 생태를 다루는 작업과 전시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포화에 이른 상황에서. 이러한 독해는 그의 작업을 단지 ‘생태예술’로 분류하는 시각만큼이나 공허하다.11 가령 생태와 환경에 관한 작업과 전시 자체가 남기는 쓰레기에 대한 자의식을 비판적으로 되먹임하는 작업과 전시의 경향을 떠올려 보라. 2019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주요의 작업이나, 직전 전시에서 만든 가벽을 부숴 담은 3톤 규모의 자루 더미와 철골과 각목 쓰레기를 ‘전시물’의 일부로 전시장 구석에 쌓았던 부산현대미술관의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전이 대표적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김지수가 에머슨을 매개로 주목했던 잡초의 당대적 위상과 함의는, 이를 장애 및 AI 테크놀로지와 이종교배시켜 최근 송은미술대상을 수상한 작가 유화수가 명민하게 파고들고 있다.12 식물과 소리가 공유하는 공명을 정연두는 ‘이주(migration)’의 문제의식을 매개로 그의 최근 작업들에서 미세하게 번안한 바 있고,13 박선민은 버섯과 건축의 접점을14, 장한나는 돌과 구분 불가능해진 플라스틱을 ‘뉴 록(New Rock)’이라 부르며 기후와 생태위기 시대의 지평선을 재규정하고 있다.15
그렇다면 ‘설치미술작가’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가령 <우리는 공기 중에 있다(We are in the Air)>(2021)는 역사학자였던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과 작가의 글, 어린 시절 장난감과 작가의 수집품(향, 채집한 본인 체취, 촛대, 이끼) 등이 진열장과 반쯤 열린 서랍의 형태로 전시됐다. <숨 Breathing>(2016)은 이끼가 소리에 빛과 향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에 착안하되, 아두이노와 LED를 활용함으로써 시각과 후각은 물론 청각을 매개로 관객들과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냈다. 돔 내부에 관람객이 들어가면 이끼 위의 향(식물추출물)이 반응하게 만든 <페트리코(Petrichor)>(2016)에서처럼 식물학자나 무용가와 협업한 작업들도 있고, <후각의 지도 A Map of Smell>(2020)나 <상상향 The Imagination of Scent>(2021) 같은 오디오비주얼 이미지도 있다. ‘생태학’과 ‘설치미술’이라는 규정이 요란하게 공회전하는 김지수의 작업에서, 이들 모두를 통주저음(basso continuo)처럼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이 후각이다. 하지만 이는 그의 작업을 냄새라는 단일 감각으로 환원하려는 순진한 시도와 엄격히 구분돼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작업들이 시청각은 물론 촉각에 이르는 다양한 감각을 동원하는 것은 후각이라는 ‘촉매(catalyst)’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단순히 어떤 냄새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면서 김지수가 “후각적 상상력”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16 빛을 모음과 동시에 산란시키는 프리즘처럼, 그에게 냄새와 향기란 ‘공감각’을 집중시키거나 다른 감각들로 분산시키는 매개인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냄새 자체가 분산되고 사라진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초기작인 <움직임에 관하여>나 <사라지는 운동>은 당시의 전시 제목인 <막연한 증폭>과 함께 후각의 작동 방식에 대한 묘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후각은 다른 감각들을 강화함과 동시에 사라진다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분산과 번역의 ‘사라지(지 않)는 매개’로 기능한다.
가령 시각적 차원에서 그의 작업들은 대개 정상적이라기보다 미술비평가인 로잘린드 크라우스와 이브-알렝 브아가 조르주 바타이유를 따라 ‘비정형(informe)’이라 부른 계보의 인상을 준다.17 이는 인상주의의 점묘법에 가까웠던 김지수의 초기 작업에서 최근의 작업들이 보여주는 불꽃, 혹은 대기의 분산 궤적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유지되는 특성이다. 물론 ‘세포’라는 형상을 환기시키는 작업들이 꾸준히 등장하는 건 사실이지만, 엄격히 말해 이들조차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비정형(informe)’에 가깝다. 이는 ‘넘겨(meta-) 옮긴다(pherein)’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그의 작업이 불러들이는 시적인 문장들의 ‘은유적(metaphoric)’ 특성을 설명해준다. ‘제자리’랄 것이 없이 경계를 넘어 분산되는 냄새처럼, 그의 작업은 다른 감각의 영역으로 범람하며 냄새를 통해 그들을 번역한다. 실지로 그가 “태초의 이끼 숲에서 방금 걸어 나온 듯한 냄새”와 같은 “냄새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사람의 신체 여기저기의 체취를 맡는 2019년의 즉흥 퍼포먼스 이후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를 시나 퍼포먼스를 ‘덧붙이는’ “공감각”의 양태로 납작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꾸준히 후각을 연마해온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예외적인 위치는 평가의 기준을 더 높게 설정하게 만든다.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김지수의 작업은 종종 시각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특정 경계 안에 자리 잡는 경향을 보이고, 이를 통해 후각을 관대한 알리바이로 이용한다고 읽힐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또한 작업실에 발생한 화재가 남긴 재를 활용한 <냄새 나무 The Smell Tree>(2019)나 그의 작업에서 “고통”을 느꼈다18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관객을 좀처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악취’보다 ‘향기’에 치우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악취와 악취미, 불편함과 비판을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이러한 구분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김지수에게 비교와 경쟁의 대상이 적다는 건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코 앞에 있는 것을 본다는 건 지속적인 투쟁”이라는 오웰의 말이 메타적으로 환기하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존재론적 곤궁이 아닐까? 예술사 전반이 그간 언어와 시청각에만 비대칭적으로 집중해왔다면, 김지수가 열어 갈 감각적 투쟁의 지평은 그 누구의 것보다 넓고 광대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