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출현의 관계. 예술은 감각적인 것과 가장 많이 얽혀 있는 진리 형태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분명 무한하지 않습니다. (중략) 우리는 유한하지만, 무한에 대해 완벽하게 모르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한에 관해서 말할 수 있고, 그것에 이름을 부여했으며, 무한이 무엇인지, 아니면 우주가 과연 무한한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이 세상을 만나고, 경험한다. 상상의 순간도 예외는 아니다. 때로는 보지 않아도 이미지가 떠오르고, 머릿속 이미지에서 향기가 찾아진다.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보드랍고 까슬거리는 질감을 느낀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의 사각거리는 소리는 머릿속을 스친다. 습윤한 아침의 편백나무. 햇빛이 쨍한 하루에 만나는 녹나무. 비가 오는 어느날 내 앞에서 아른거리는 삼나무와 티트리(tea tree). 뚜렷이 보이진 않아도 나를 감싸는 대기는 향취를 전한다. 해가 지는 붉은 하늘의 비자나무. 그 사이사이 만났던 이름을 미처 다 알아채지 못한 꽃들 그리고 풀들. 이끼와 흙. 새와 곤충들. 더 작은 생물들. 분자들. 천연의 자연이든 가꿔진 정원이든 제각각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하늘은 선선하다. 춤추듯 살랑이는 향기들. 호흡하는 대로 모두의 향이 만나고, 겹치고, 합쳐지고, 밀어내기도 하는 하루 더하기 하루들. 말 그대로 신비롭고 아름답다. 그리하여 작가는 나타나거나 흩어지는 감각의 양상들을 붙잡고, 지우고, 상상하고 재조합했다. 수집과 기록이 담기는-흐르는 투명하고 불투명한 공간은 열리고 닫히고, 다시 열리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반작용, 현상과 시도의 되새김들은 작고 작은 세계와 크고 큰 세계를 넘나들며 생각을, 감정을 자극한다.

김지수 개인전 《냄새 분자가 되어》(2025)에서 향기는 모이고 흩어지며 보이고 보이지 않기를 반복한다. 시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시각을 넘어서는 형상을 만든다. 작가는 어려서부터 후각을 비롯한 감각에 예민했다고 밝혀왔다. "암석, 덩굴, 촉촉한 이끼 냄새, 빛과 만나는 향, 체취, 상호작용, 흩어지고 모이고 사라지고, 냄새 분자가 되어, 시공간을 오가는, 동시 감각" 같은 작가의 메모가 암시하듯 감각 하기는 예술적 착상의 근거가 된다. 소중한 장소를 떠올리면 그곳의 향기가 떠오른다. 향으로 인해 잊혔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리면 특별한 향취가 되살아난다.

인간의 몸과 정신을 분리할 수 없으므로 감각은 생각과 감정에 담긴다. 서로는 긴밀하게 관계 맺으며 상호 작용한다. 김지수가 작업의 시작점으로 삼은 후각은 숨을 쉬는 행위 그 자체에서 얻어지는 생과 직결되는 감각이다. 살아 있는 인간 대부분은 평생 향을 맡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향은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감각된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 같다. 그나마 피하려면 그 장소를 벗어나야 하는데 언어로든 이미지로든 형용하기 어려운 냄새는 그 위치를 확정할 수 없다. 그저 있고, 확산하다가 흐려진다. 금방 사라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주체의 후각이 금방 적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잠시 후 사라짐을 반드시 약속하는 경험이다. 한순간의 사건과 같다.

그래서 작가는, 꽤 오래전부터 그랬듯 이번에도 과학적 탐구가 바탕이 되었지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에 선행하는, 때로는 형언하는 게 불가능한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신비로운 영역을 거쳐야 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미지의 무언가를 향하는 마음은 더 강해졌다. 규정되고 확립된 영역을 넘어선-초월한 것을 읊조리는 시처럼 존재와 존재 사이를 메우는-잇는 향기들은 인간의 지식이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 미처 붙잡지 못했던 것을 전한다. 작가의 "시적 우주"는 온전히 지각할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는, 무엇보다 붙잡을 수 없는 세계를 담아내고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유의 시야를 감각으로 좁히면 더욱 명확해진다. 후각뿐 아니라 감각적 경험은 언제나 사라진다. 감각하는 그 순간이 지나면 신기루처럼 기억-상상에서 맴돌 뿐 지속되지 않는다. 마치 한순간의 반짝이는 사건 같다. 그리고 "사라지려는 것을" 어떻게든 붙잡아 "현전"했음을 "명명하는" 작가의 행위는 쓰기이든 그리기이든 시적이다.

특히 전시 《냄새 분자가 되어》에는 자연이 두드러져 회화인 <풀풀, 숲이 되어>(2025), <흩날리는 암석의 시간>(2025), <숲이 되는 꿈>(2025)을 비롯해 <안녕~>(2025), <킁킁, 제주 돌산과 나>(2025), <타조와의 대화>(2025) 같은 드로잉에서도 목가적인 전원시의 분위기가 강하다. 실제로 김지수가 향을 채취하는 과정은 그저 조사와 수집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걷고, 보고, 듣고, 호흡하며 대기를 느낀다. 냄새를 맡고 향을 모으는 과정에서 대상을 만진다. 그렇게 세상과 교류하며 작가의 안과 밖은 서로를 향해 섬세하게 침투한다. 온몸의 감각 전부가 작동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유의미하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관객에게도 선사하기 위해 전시장에 녹나무, 비자나무, 삼나무, 티트리, 편백나무, 다섯 가지 나무 향을 준비했다. 김지수가 식물에서만 향을 채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제주자원식물연구소와의 협업을 토대로 2년여 동안 제주도의 숲과 인체와의 관계를 탐구했던 결과가 담겼다. 신비롭게도 서로 다른 종, 서로 다른 모습 그리고 향을 가진 존재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반투명한 연분홍 베일이 드리워진 공간은 나무들이, 구름이, 보슬비가 감싸는 숲처럼 나 그리고 당신-누군가를 감싸안는다. 작은 오로라를 연상시키는 빛을 발산하는 오브제는 온기를 더한다.

한편 숲에서 일어난 작가의 외적이고 내적인 경험과 사유의 흐름은 영상 작품인 <냄새 분자가 되어>(2025)에 보다 직접적으로 담긴다. 어느 순간부터 작가는 단절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고 조금은 낭만적인 합일을 꿈꿔보게도 되었다.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 있는 식물들의 심미적 진동"이 전달되면 인간은 평온함에 빠져든다. 아마도 작가는 주변 조건에 따라 움직이고 반응하는 식물을 느꼈을 것이다. 땅에 뿌리내렸다 하여 그저, 그렇게 머물기만 하지 않는다. 인간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식물도 자유롭고 우아하게 움직인다. 다만 인간의 시각이 지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천천히 움직일 뿐이다. 또한 식물의 성장이나 잎사귀의 변화도 움직임이다. 햇빛을 따라 나뭇가지의 방향이 바뀌고 바람에 나뭇잎은 흔들린다. 우주의 흐름에 반응하며 살아 숨 쉬고,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과 교감한다. 식물의 영혼, 식물의 의지를 상상해 본다. 살아 있음의 증거인 호흡하기 속에서 나무의 냄새 분자도 자유롭게 이동하고 스며든다. 때로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향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에 김지수는 냄새 분자의 이동, 나무 혹은 자연의 춤을 그려낸 무보 같은 <나의 시적 우주> 시리즈(2025)에서 자유롭게 확산하고 떠다니는, 그러나 조금은 허무하게 흐려지는 향기와 그 안에 담긴 생의 작용을 잠시 붙잡았다. 작업을 진행할수록 작가는 완벽히 파악할 수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무언가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향기도, 마음도, 생각도 그리고 생도 고정된 형상이 없고, 한정할 수 없으며, 붙잡을 수 없다. 자취만 아른거리기 때문에 찬란하고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형과 색 위로 행위와 시간과 향이 투영되고 그렇게 "얽히고설키는 획, 공간, 풍경의 풍경"이 완성되었다.

작가-인간은 무한하지 않지만, 무한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으며 그것을 끝없이 생각한다. 알려고 한다. 그리고 꽤 자주, 무한에 관한 질문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영원은 단일한 하나의 존재-상태로 끝없이 지속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만큼 유한도 생각하게 된다. 유한과 무한 그리고 영원은 장소-공간과 시간, 물질과 비물질, 감각과 마음, 존재와 비존재 모두와 연결된다. 하나같이 세상의 원리와 분리할 수 없는 단어들이다. 확산하는 향은 유한인지 무한인지 질문해 본다. 그리고 작가의 작품-예술의 유한성과 무한성에 대한 사색에 빠진다. 그렇게 찰나는 영원으로 이어진다.